대학교 1학년때 처음 경제학 수업을 듣기전 저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잠깐 맛보기로 배웠던 경제에 대해서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제학원론 수업에 교수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수업은 제 생각과는 조금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경제에 대한 궁금한 점들은 여전히 잘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죠. 지금 생각하면 원론 수업에서 뭔가 큰 해결책을 기대한다는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것을 알겠지만, 그 당시에는 잔뜩 기대를 가졌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장기적인 관점만 있는 수업에 대한 실망
물론 다른 수업도 비슷했습니다. 수많은 곡선과 숫자들의 싸움속에서 제가 얻을 수 있는 결론들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습니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결정되는 당연한 원리속에서 세상 모든것들은 결정되었습니다. 물론 이 단순한 원리가 틀린것은 아니지만, 제가 원하던 답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좀더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답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균형으로 가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자"와 같은 말들은 제가 해당 과목에 대해서 흥미를 잃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들과 각종 공식들이 적혀있는 책들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몇가지 필수적인 수업만을 듣고서 더이상 경제학 과목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회계사 시험을 보기 위해서 필수적인 다른 경제학 공부들을 하긴 했지만, 이미 차가워진 저의 마음은 더이상 뜨거워지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열광하던 아이돌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것처럼 저의 냉담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어렸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어나는 당연한일들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바로 앞도 바라본다.
그나마 계속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것은 그 당시 유행했던 책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바로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라는 경제학 입문서 덕분입니다. 다양한 경제학자들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보는 경제 입문서는 학교수업에서 잃어버린 저의 흥미를 되살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책에는 수업시간에는 들을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기적인 관점만을 강조하는 이론에 대한 실망적인 시선을 넘어선 여러가지 아이들과 경제학자들의 활동들도 존재했습니다. 비록 입문서이기 때문에 깊이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제학에 약간의 애정을 가질수 있게 되었던 것이죠. 역시나 제가 제일 좋아했던 말은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였습니다. 제 마음에 단비가 내리는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세상에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한 이유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나온 이후 수십년이 지나면서 저는 좀더 복잡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장기적인 관점 - 균형- 을 중요시하는지를 깨닫게 된것이죠. 그리고 제가 생각했던것보다 사회는 더 복잡하고, 더 많은 불균형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불균형한 요소들이 균형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죠. 이러한 균형의 회귀과정은 다양한 말로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은 이러한 균형의 회귀과정을 의미하는 문구입니다. 비단 이러한 균형은 경제학에만 적용되는 용어가 아닙니다. 실제로 삶의 많은 부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균형-으로 돌아갈만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 회사와 개인의 관계등 서로 다른 두가지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서로의 가장 간결한 필요성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는 말이죠.
그래야 개인도, 사회도 정상적인 삶을 위한 방향성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인 관계는 언젠가는 정상화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모든것의 방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비록 경제학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장기적인 관점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 벗어난 과정: 균형으로 가는 시간을 연장한다
하지만 경제가 그러하듯 다른 모든일들도 정상화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립니다. 경제학에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결정되는 균형에 빠르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바로 "완전경쟁"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현실과는 다르게 말이죠.
경제학의 가정이 현실과 다르듯, 현실에서 균형에 도달하기 위한 많은 상황들도 현실과는 다른 가정들을 제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정들은 우리가 생각한 장기적인 목표인 균형이 이루어지기 위한 시간들을 연장시킵니다. 균형에 도달하기 까지 수십년 혹은 수백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긴 시간이 걸리는것은 완전경쟁과 같은 불가능한 가정들이 현실에는 더 많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정들을 현실에 맞는 조건들로 변화해가면서 균형에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시키려고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을 줄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균형에 도달하는 사이에 대다수는 구성원들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기도 하죠.
현실에서 균형으로 가는길이 어려운것은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곡선이 한쪽 방향으로 흐르면서 만나는것과 다르게 현실의 균형은 극단에서 극단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위의 시간 연장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균형에 도달하기 과정에서 각 상황을 대변하는 구성원들이 각자만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균형에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극단적인 상황에 도달하여 극한의 이익을 추구하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반대의 극단에 도달하여 극한의 이익을 추구하려다가 실패하는 상황이 계속 벌어집니다. 그래서 양쪽의 이익집단이 서로의 이익을 갉아먹고 댓가를 치루며 실패하다가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상황이 되는것이죠.
최근 수십년간 한국에서 발생한 다양한 경제적인 사건들과 정치적인 이벤트들은 이런 극단과 극단의 상황을 거쳐왔습니다. 한국에 존재하는 두가지 거대한 정치집단들의 실패는 경제와 정치적인 측면에서 극단의 상황을 통해서 균형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여집니다. 한쪽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가 절대 선이고 다른쪽은 절대 악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선이란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절대악도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런 두 집단을 극한으로 지지하는 세력들이 더욱 거세지면서 우리는 균형으로 도달하는 지점을 찾는데 더 많은 희생을 낳고 있는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저의 입장에서 이렇게 극단에서 극단으로 향하며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은 너무나 잔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은 모두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균형을 찾아가는 중에 현재와 같은 극악의 변수들-저출산-이 더해진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기 마련입니다. 아마 저는 삶의 마지막까지 제가 생각했던 많은 균형의 결말을 바라보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저에게는 30년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고, 거동이 불편해질 시간을 고려하면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디어에서 나오는 장기적인 관점들을 들을 때마다 남은 제 인생에서 반드시 이뤄야할 것들을 생각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내가 꼭 해야할일들과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내는 작은 성과들이 저에게는 장기적인 관점의 균형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성과들을 위해서는 다음 한주도 소중하겠죠. 이번주 이 메일을 읽게되면 자신의 작은 목표에 대해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성공적으로 보내야할 다음주의 작은 미션들도 말이죠.
다음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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